(사)한국정치평론학회 회원의 칼럼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송구영신 때 들으면 제격이다. 평생 불우하게 살았던 이 음악가는 교향곡 9번을 내놓고 3년 만에 세상을 떴는데 마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보는 것 같은 희망을 선사한다. 온갖 사건·사고로 점철된 한 해의 아픔을 용광로에 녹여 신년의 기대와 설렘으로 뽑아내는 전환의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세계의 오케스트라들은 9번 합창을 연말연시에 가장 많이 연주한다.
‘베토벤의 합창’ 송구영신 때 들으면 제격
베토벤은 암시와 복선을 끊임없이 제시하다 막바지에 환희로 치닫는다. 긴장되고 불온한 기운이 곳곳에 맴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전진해 보라. 어느 틈에 밀려드는 말할 수 없는 감격에 가슴이 터질 듯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1악장과 2악장, 3악장은 빠르거나 매우 빠르거나 느리다. 단계마다 무드가 다르다. 각 악장을 관통하는 공통점도 있다. 매우 다양한 종류의 짧은 멜로디들이 반복적으로 명멸한다. 마치 유소년기와 청년기, 장·노년기 각각 다른 시기에 수없이 명멸하는 미움이나 슬픔, 충돌의 에피소드들 같다.
어떤 멜로디는 서늘하거나 두렵다. 다른 선율은 재미있고 놀랍다. 또 다른 것은 감미롭거나 준열하다. 마지막 4악장에 가서 비로소 알게 되지만 1, 2, 3악장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다 사라지곤 했던 짧은 선율들은 9번 교향곡의 거대한 주선율을 구성하는 일부들이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서 자기의 운명을 완연하게 자각하고 그 운명의 암시와 복선이었던 지난 시절 에피소드들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악기음에다 인간들의 합창까지 더해 눈덩이처럼 커진 ‘환희의 송가’를 끝까지 듣다 보면 지난 한 해 걸어왔던 이런저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4악장에 빠져들면서 내 경우, 죽음은 삶의 소멸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완성되면 별처럼 빛나는 세계가 열릴 것이다.
베토벤의 몸은 중병들의 집합소였다. 청력 상실은 그중 하나였다. 이 노래가 처음 공연된 건 182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다. 청력을 완전히 잃은 베토벤이 4악장 환희의 송가가 끝나 관객이 환호하는데도 한참 뒤 청중 쪽을 돌아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손에 고름 나는 서형민, 베토벤 콩쿠르에서 우승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베토벤처럼 심한 육체적 질병을 겪은 사람들과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최근 독일 본에서 열린 베토벤 콩쿠르 우승자는 한국의 피아니스트 서형민(31)이다. 그는 몇 년 전 왼손 네 손가락의 손톱이 들뜨고 염증이 심해 손톱을 뽑아내는 수술을 받았다. 완치가 안 돼 콩쿠르 직전까지 손에서 고름이 나왔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로서 손가락 질병은 베토벤의 청력 상실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서형민은 콩쿠르 우승의 비결을 “마음을 비우고 오로지 음악에 집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성인은 베토벤 연구와 해설의 탁월한 전문가다. 그는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의 저자인데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뇌성마비를 앓은 내 두 발목은 모래주머니를 찬 듯 늘 무거웠고, 엇박자 리듬을 타며 절뚝거렸다. 신체가 성장하는 기쁨을 누려야 할 시기에, 나는 슬픈 유년을 보내고 있었다.”
나성인 작가는 육체적 질병에서 비롯된 생의 고뇌를 베토벤과 만나면서 치유받았다고 했다. 베토벤은 세상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이든 희망의 시작으로 삼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송구영신! 올 한 해 감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