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정치평론학회 회원의 칼럼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2011년 12월13일은 군인이자 혁명가, 기업인에다 교육자, 정치인이었던 고 박태준 포스코(옛 포항제철) 회장이 84세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 10주기 추모 행사가 서울 포스코와 동작동 국립묘지, 포항 등에서 조촐히 열리고 있다. 2010년 중국 난징~상하이 코스로 ‘박태준 동행 취재’를 한 적이 있다. 지구상에서 박태준의 마지막 여행에 참여하면서 나는 일과 인생을 꾸려 나가는 거인의 큰 지혜를 배웠다. 큰 지혜는 대담하다.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정밀하게 학습한다. 그 결과 경이로운 상상력과 창조성이 탄생한다. 박태준 회장이 여행 중 들려준 얘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박태준 10주기…큰 지혜는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1969년 박태준은 도쿄에서 일본 산업상 오히라와 대좌했다. 한·일 수교에 따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받기로 돼있는 농업지원금을 포항제철 설립을 위한 철강자금으로 전환하는 게 박태준의 면담 목적이었다. 42세 때다. 오히라는 25세 연상이다. 별명이 ‘둔중한 소’인데 거만기가 몸에 배어있었다고 한다. 오히라는 “한국의 산업발전 수준은 농업에 집중해야 하는 단계다. 철강회사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 헛돈 쓸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거절했다. 두 번 퇴짜 맞고 세 번째 만난 자리였다. 박태준은 1주일간 도쿄의 정부간행물보관소를 샅샅이 뒤져 얻은 지식을 오히라에게 설파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야하타 제철소를 세웠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제철소를 또 지었다. 일본도 산업적 필요가 아니라 안보적 고려 때문에 철강을 했다. 한국의 안보는 일본의 안보와 직결된다. 한국이 북한에 먹히면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일본의 옆구리를 찌르는 단도가 될 것이다. 포항제철에 자금을 지원해 달라.”
오히라는 “그런 걸 다 어디에서 조사했느냐”며 거만기를 거두고 박태준을 다시 보았다. 오늘의 포스코는 이런 순간순간의 기적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수모와 치욕에 무너지지 않고 정밀한 학습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대담한 반격의 효과였다.
박태준은 중국 산업화의 아버지 덩샤오핑(1904~97)이 탐내던 사람이었다. 덩샤오핑이 1970년대 말 일본을 방문해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 포항제철 같은 철강회사 하나 지어 달라”고 하자 이나야마 회장이 “중국엔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지 않냐”고 응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상하이에서…박태준과 덩샤오핑의 세기적 만남
박태준 회장은 1992년 비밀리에 덩샤오핑의 초청을 받아 상하이 영빈관에서 나눴던 얘기를 들려줬다. 덩샤오핑이 “한국의 근대화가 어떻게 성공했나.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박태준은 “우리는 산업화로 나라를 지켰다. 포항에 제철소를, 구미에 산업단지를 지어 북한 공격을 막아냈다. 중국이 우리나라처럼 근대화 노선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덩샤오핑은 “내가 죽더라도 중국에서 근대화 중심 노선을 뒤집을 사람은 없다. 내 뒤를 이을 지도자들을 다 줄 세워놨다”고 답변했다.
박태준 회장은 중국의 철강화와 산업화를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태준의 경세철학은 ‘산업화로 빈곤을 퇴치해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이 철강기술을 공짜로 가져온 것처럼 한국은 중국한테 공짜로 기술을 전해 줘야 한다. 동아시아 3국의 평화적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준은 거인이었다. 동아시아의 전략가였다. 얄팍한 시대에 거인의 지혜가 그리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