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정치평론학회 회원의 칼럼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영화 《미나리》의 클라이맥스는 이민자 가족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농장 창고가 활활 불타 밤하늘의 연기로 속절없이 사라지는 광경이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은 젊은 부부가 광활한 경작지에 웃으면서 새로운 씨를 뿌리는 모습인데 영화는 별다른 설명 없이 여기서 끝이 난다. 오늘이 다가 아니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생명의 소리를 들은 것 같아 나는 마음이 뜨거워졌다. 우리가 인생에서 종종 절망을 맞이할 때 경험하는 일이지만 꿈과 믿음은 그 자체로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조건이나 상황이 좋아져서가 아니다. 살아내야 하기에 희망을 만들어내고 책임을 져야 하기에 꿈과 믿음을 불러내는 것이다.
나는 정치를 취재하면서 정치가 사람들한테 희망과 용기, 믿음을 심어주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특히 패배한 정치인에게서 그런 면을 보곤 했다. 최근 거대 야당과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경쟁에서 아슬아슬하게 진 안철수는 패배의 인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치에선 실패투성이다. 그래도 안철수에게서 절망의 빛을 찾아볼 수 없다. 안철수의 특이함은 이기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아수라장 정치 현실에서 양보, 약속, 헌신, 정직 같은 인간 세상에 필요한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점이다.
불과 넉 달 전까지만 해도 거대 야당은 타성과 게으름, 지리멸렬에 젖어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었다. 절망적인 야권 정치판에 희망의 불빛을 쏘아올린 건 맨주먹밖에 없던 안철수의 서울시장 출마선언이었다. 정권교체의 사다리가 되기 위해 대권을 포기하고 소권(小權·서울시장 선거)을 수용한 것이다. 안철수 입장에선 희생적 선택이었다. 안철수가 여야 통틀어 상당 기간 부동의 1위를 유지하면서 여야 판세는 뒤바뀌고 거대 야당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안철수가 최종적으로 능력이 부쳐 후보 단일화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분석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의 소권 선택과 후보 단일화 약속 이행, 깨끗한 승복과 헌신적인 선거 지원 의사표명이 없었다면 거대 야당이 지금과 같은 유리한 위치에 이르지 못했으리라는 점도 자명하다. 거대 야당이 승리감에 취해 안철수의 미덕을 잊는다면 서울시장 본선에서 역풍을 맞을지 모른다. 지금 거대 야당한테 필요한 건 겸허함이라는 가치다.
안철수는 3월24일 빨간 넥타이를 매고 오세훈 후보와 함께 거대 야당의 의원총회에 참석한 뒤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라고 왜 속으로 피눈물이 나지 않겠나. 하지만 나는 육십 평생 거짓말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했다. 단일화하기로 했고, 결과에 승복하고 누가 되더라도 열심히 돕기로 약속했으니 그걸 지킬 뿐이다. 어제까지의 일은 잊고 앞만 보고 달려 나가겠다. 그게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힘이다. 오세훈 후보보다 더 열심히 뛰려 한다. 경선 상대자와는 큰 적이 되곤 하는데 나는 오세훈 후보가 선의의 경쟁자라는 생각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경선 토론 때도 오세훈이 자기의 약점에 대해 충분히 답변할 시간을 주려고 했다. 김종인 대표도 어른으로, 경륜 있는 분으로 깍듯이 모시겠다.”
안철수의 정치력에 의문을 제기할 순 있어도 그의 진심을 의심하긴 어려웠다. 정치력 때문에 안철수는 패배했을 것이다. 안철수가 패배했다고 그에게서 꿈과 희망을 주는 정치를 발견하는 데 장애가 되진 않았다. 꿈과 희망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할 때 더 필요한 덕목 아닌가. 위대한 패배 뒤에 위대한 승리를 거둔 정치인도 많다.
정치는 보통 승리의 기술로 인식된다. 그러나 정치가 승리의 기술이기만 하다면 패배자를 포용해 국민 통합을 이루는 공동체의 목표는 어떻게 달성하나. 숱한 실패와 역경을 딛고도 인간성을 지켜가며 따뜻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승리만을 아는 집단이 어떻게 이끌고 가겠나. 정치가 꿈과 희망을 팔고 정직과 약속, 희생과 같은 가치를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안철수의 도전과 실패는 허무하지 않다고 본다. 승리의 기술에선 못 미치지만 사람들에게 승리보다 더 중요한 살아낼 꿈과 희망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