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정치평론학회 회원의 칼럼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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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이 시작됐다. 대화는 스피디하게 진행돼 빠른 시일 내 트럼프와 푸틴의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것이다. 종전 테이블에서 한쪽 당사자를 밀어낸 채 미·러가 자기 입맛대로 약소국의 운명을 요리할 게 뻔하다. 19~20세기 제국주의 시절에 두 늑대가 각자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식민지 스테이크를 갈라 먹던 오싹한 그림이 연상된다.

트럼프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젤렌스키를 동정하기커녕 지난 3년간 준 무기 외상값을 갚으라고 독촉장을 보냈다. 강자가 다른 강자와 손을 잡고 약자를 죽어라 패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트럼프를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라고 매도할 일도 아니다.

선한 강대국은 없어…선하게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을 뿐

국제 정세라는 게 원래 그렇다. 트럼프는 양의 탈을 벗었다는 점에서 정직한 면이 있다. 헷갈리지 않게 한다. 타국 대통령한테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힘이 있어야 한다. 대국이든 소국이든 모름지기 국가는 다른 나라들이 겁을 낼 만한 무엇인가 있어야 한다. 무력이든 돈이든 기술이든 외교력이든 지도력이든 똘똘 뭉치는 단결력이든.

우크라이나의 현재 모습엔 1950~53년 북한·중국(배후는 소련)과 전쟁을 치른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상황이 어른거린다. 6·25 남침 초반 속수무책이었던 한국은 미국 민주당 출신 트루먼 대통령의 참전 결단으로 기사회생한다. 우크라이나를 민주당 출신 바이든 대통령이 도운 것과 유사하다. 미 대선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승리하자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휴전 협상을 강제했다. 공화당의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한테 종전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여기까지가 우크라이나와 70여 년 전 한국 스토리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제부터 젤렌스키가 이승만 수준의 외교 역량과 정치력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았다.

이승만은 30세 때인 1905년 8월 뉴욕주 사가모어힐(Sagamore Hill)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이래 40년간 미국에 살며 국제정치 생리를 체득했다. 그의 일생을 지배한 트라우마 중 하나는 ‘결정적 순간 미국의 배신’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이승만에게 조국을 구원해줄 듯 말했지만 그 1주일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한반도 지배권을 일본한테 넘긴 사실을 뒤에 알게 되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 이는 ‘선한 강대국은 없다. 선하게 움직이게 하는 힘이 필요할 뿐’이라는 의식을 낳았다.

또 이승만은 1941년 8월 출판한 《Japan Inside Out》에서 “일본은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천황제 국가로 반드시 미국을 칠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그해 12월 과연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발생했다. 이승만은 일약 베스트셀러, 워싱턴의 유명인으로 떴다.

‘총성 없는 내전’에 돌입한 한국도 어떻게 될지 몰라

다시 6·25 휴전 얘기로 돌아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북·중이 전개하는 정전 협상을 끝까지 반대했다. 그는 핵심 쟁점이었던 전쟁포로 문제를 터뜨려 장외 주도권을 잡는다. 반공 포로 2만5000여 명을 전격 석방해 전 세계를 흔들어 놨다. 미·북·중 휴전 협정엔 서명을 거부했다. 대신 이승만한테 질린 아이젠하워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체결돼 현재 진행 중)을 따냈다. 한미동맹은 트럼프식 고립주의 성향을 갖는 미국 외교사에 유례없는 양자 군사조약이다. 이승만이 낚아챈 한미동맹의 울타리 안에서 한국이 산업화·민주화·정보화에 성공했다. 마침내 일본을 제치고 세계 6위 강대국에 올랐다.

모쪼록 국제사회의 미아가 되어가는 우크라이나가 이승만 시대 한국과 같은 반전을 이루길 바란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남 얘기할 때가 아니구나. 정부 수립 이래 최악의 권력 공백, 총성 없는 내전에 돌입한 한국이 또다시 늑대들의 스테이크로 추락할 수 있겠다는 불안이 엄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