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정치평론학회 회원의 칼럼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허민 전임기자
역대 정권의 ‘핵관(핵심 관계자)’들이 특정 시기에 백의종군했던 건 낯설지 않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과거로부터 대선 같은 큰일을 전후한 시점에 가신이나 최측근들이 자신의 보스를 위해 공직 불출마나 2선 후퇴를 선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9월 김대중(DJ)의 ‘7가신’인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남궁진 최재승 설훈 윤철상이 “DJ가 집권하면 어떤 임명직 자리에도 나서지 않겠다”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18대 대선 때인 2012년 10월에도 문재인의 ‘9인 측근’ 양정철 전해철 이호철 김용익 정태호 소문상 윤건영 윤후덕 박남춘이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이들은 “이름도 직책도 없이 문재인 승리만을 위해 뛰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3·9 대선 전에는 이재명의 ‘7인회’ 멤버 정성호 김영진 김병욱 임종성 문진석 김남국 이규민이 “이재명이 당선돼도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
영원할 것 같던 권력은 측근 비리나 권력 암투가 곪아 터지면서 내부로부터 먼저 무너져내리곤 했다. 그런 점에서 주군의 큰 꿈을 도왔던 측근들이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스스로 희생하는 건 보스와 정권을 지키려는 충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군의 향후 정치 행보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결단인 셈이다.
반면, 보수 진영에는 보스를 결사옹위하겠다는 각오로 자신을 희생하는 정치문화가 별로 없었다. 이명박 정권 출범에 기여했던 이상득 최시중 이재오 박희태 김덕룡 등 ‘6인회’나 박근혜 정권 창출을 도운 ‘7인회’ 강창희 김기춘 김용갑 김용환 안병훈 최병렬 현경대는 백의종군이나 2선 후퇴를 선언하지 않았다.
윤석열의 핵관들은 어떨까. 장제원이 윤의 ‘대통령 비서실장’ 제안을 거듭 고사했다는 미담이 나돌았지만 사실관계는 좀 다르다. 당선인은 현역 의원을 비서실장에 기용할 생각이 없었다. 윤은 일찌감치 그에게 국회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고 한다. 여소야대에서 현역 의원을 임명직으로 빼 오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비서실장 거듭 고사’ 에피소드가 장제원 자신의 이름값을 올리려는 언론 플레이였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대통령 주변에 있으면 안 된다. 그가 차기 정부 초대 내각 파일을 틀어쥐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터여서 더욱 걱정된다.
권성동은 ‘안철수 과욕론’ ‘김오수 사퇴 압박성 발언’ 등으로 연거푸 파문을 일으켰다. 일단 여의도 정치 무대로 돌아갔지만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될 그가 또 다른 설화를 일으켜 주군을 부담스럽게 만들까 봐 걱정이다. 또 다른 핵관 윤한홍은 ‘청와대 이전 TF’ 팀장으로 윤석열의 귀를 잡고 ‘용산 이전 드라이브’를 부추긴 인물이다. 민주주의는 절차와 과정에서 가치와 안정을 획득해나가는 체제다. 윤한홍이 민심 수렴 과정을 무시하고 당선인을 외통수로 몰아넣으며 여론 악화를 불러온 실책은 가볍지 않다.
백의종군 미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윤핵관이 설치는 일은 막아야 한다. 당선인이 역대 최악의 취임 전 지지율을 받는 데엔 측근들의 과오도 컸다. 차기 정부의 성공과 국정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윤핵관은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바로 ‘공(公)’이다.
